학술/학술대회

오컴의 면도날

Kludge 2021. 5. 6. 10:28

오컴의 면도날

 

 

한국  ITS  춘계학술대회

 

 

1. 간만의 나들이

어느덧 흐드러지던 벚꽃과 봄 향기를 무더운 여름 햇빛이 쏘아대며 쫓아내던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에 오랫동안 가지 못했던 강릉에서 개최되는 학술대회에 참가할 기회를 얻었다. 철없던 학부 시절 친구들과 해를 보자며 떠났던 겨울의 황량한 모습과 대비되는 따뜻한 도시에 도착한다. 연구실에서 틀어박혀 퀭한 눈으로 논문만 보고 있다 보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버릴 것만 같은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이 생겨났다. 평소에는 그런 생각이 잘 들지 않았다가 지금 진행하는 프로젝트에서 특히 더 그런 느낌을 받은 것 같다.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치기 어린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았다.

 

 

 

2. All models are wrong, but some are useful

지도교수님과 열심히 미팅하고 준비했지만 초라해 보이는 내 연구를 다른 사람들에게 발표한다는 것은 매번 참석할 때마다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군가가 드러난 내 맨살을 보고 키득거리는 것 같은 긴장감을 느낀다. 볼빨간사춘기의 여행을 들으며 창밖의 완벽한 강릉의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은 빨리 치워버리고 싶다. 다만, 모든 연구는 완벽할 수 없다(All models are wrong, but some are useful)며 이전 학술대회에서 만난 어느 박사님의 조언을 위로 삼아 긴장을 풀어본다.

 

 

3. 긴장감

해가 산속으로 숨으면서 황금색 빛깔을 내뿜던 시간에 도착한 우리는 먼저 주변 시장 근처에서 먼저 검색해 두었던 맛집들에 들러 숙소로 돌아온다. 운전을 맡은 동료는 힘이 든다며 먼저 곯아떨어졌기 때문에, 더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제 학술대회 발표준비를 미룰 까닭이 없어졌기 때문에 다시 긴장감을 가지고 스크립트를 몇 번 읽고 발표를 점검한다. 아직도 부족한 점이 너무 많은 것 같지만, 고쳐야 할 방향을 알기가 어려운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이 학술대회에 참가한 이유이리라.

 

 

4. 전우애

시간이 지나고 우리 동료 중 하나가 작년 한국 ITS 학회에서 친해졌던 다른 대학에서 참가한 학생들이 찾아온 덕분에 함께 머리가 찡하도록 유쾌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젊고 건강한 우리가 이렇게 우연히 만나 각기 다른 환경에서 서로의 어려움을 공유하고, 위로하며, 때로는 서로에게 배워갈 수 있다는 점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졌다. 바다 냄새를 맡으며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다가 잠들면서 오길 잘했다고 동료에게 말한다. 그도 그렇다고 한다.

 

 

5. 가야할 길

다음 날, 눈을 뜨고 정장을 차려입고 학술대회장으로 가 등록을 마치며 오랜만에 보는 교수님들과 박사님들과 인사할 수 있었다. 어느덧 새내기만 같던 내가 박사를 수료하고 졸업을 바라보는 시기가 되니 다들 더 어찌나 그렇게 열심히들 사셨던 건지 괜히 찔리는 마음만 더 커지는 것 같다. 그런 마음을 아시는지 학회 시간이 다가와서 몇 마디 나누지 못했지만 감사하게도 사려 깊은 조언을 해주신 선배님들께 글을 쓰며 감사한 마음을 다시 느낀다.

 

 

6. Simple is the best

학술대회장에서는 먼저 나와 같은 분야를 연구하는 연구원들의 새로운 관점들을 볼 수 있었다. 아니, 새롭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이런 부분들을 생각하지 못하니 내 연구에 쓸데없는 가설들만 추가되고 현실과 더욱 멀어진 것 같았다. 흔히 연구자가 빠질 수 있는 함정에 빠져 있던 것이다. 이윽고 내 차례가 왔지만, 그것을 고칠 시간은 없었기에 그대로 발표했고, 감사히 피드백도 받았다.

 

 

7. 오컴의 면도날

오컴의 면도날은 가장 간단한 아이디어로 구성된 해결책이 최적해에 가깝다14세기 영국의 논리학자 오컴의 원리다. 그런 면에서 학술대회 참관은 내 너저분했던 가설들을 과감히 쳐낼 수 있었던 면도날이었다. 내 논리의 속살을 드러내는 것이 수치스럽고 부끄러웠지만, 몇 번의 면도를 통해 점점 단단해지고 강해질 수 있었다. 학술대회에서 만난 같은 생각을 하는 학생들, 아낌없이 조언해주신 박사님들과 교수님들, 아직 부족한 내 논문에 주의 깊게 봐주시고 통찰력 있는 질문을 해주신 고마운 연구원님을 생각하며, 나도 누군가의 면도날이 될 수 있을 미래를 생각해 본다.